밤 벚꽃-고영민꽃이 활짝 피었다는 소식을 듣고일부러 며칠을 더 지체했습니다당신을 업고천변에 나옵니다오늘밤 저 꽃들도 누군가의 등에얌전히 업혀 있습니다어둠 속에서 한 나무가 흘러내리는 꽃을몇 번이고추슬러 올립니다무거운데이젠 나 좀 내려다오, 아범아내려다오피어 있을 때보다떨어질 때 더 아름다운 꽃이 있습니다당신을 업고 나무에 올라풀쩍, 뛰어내렸습니다드라마 《나의 아저씨》의 한 장면할머니가 지안에게 달이 보고 싶다고 하자지안은 마트 카트를 끌고 온다어두운 골목길과 계단을 겨우 내려온다중간에 동훈이 도와주긴 하지만어디에서나 볼 수 있지만 지안의 방에서는 모습이보이지 않는 환한 달그렇게 꽃이 활짝 피었다는데「밤 벚꽃」의 화자는 며칠을 기다린다피어 있어도 떨어져 있어도 아름다운 꽃달과 꽃의 환함으로 우리들의 어두운 마음 속을 들여다본다
늙어간다는 일은 왜 이다지도 쓸쓸하다는 말이냐.
비루함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덧없음이란 말이다.
가질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것, 이토록 애매한 그것을 우리는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. 2002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한 이래 악어 공손한 손 사슴공원에서 이 세 권의 시집을 펴냈던 시인 고영민이 신작을 선보인다. ‘구구’라는 제목으로 ‘구구’라는 이름으로. 시집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시인이 제 마음을 투영해낸 한 문장으로 이 글을 시작한 데는 마치 바지가 무릎에 걸린 듯한 그 엉거주춤, 그 어찌할 바 모르겠는 우리들 저마다의 사연들이 이 어정쩡함에 속해 있지 않을까 해서다. 생각해보라. 세상에 태어났다는 명백한 사실. 그리고 우리 모두 죽을 거라는 명징한 사실 가운데 지금 살아 있는 우리들이 놓여 있지 않은가. 태어나자마자 말로 제 삶의 시작을 카운트할 수 있는 이가 없듯 죽어가면서 말로 제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 이도 없다. 구구, 마치 비둘기가 모이를 쪼듯 구구, 뒤로 풀어야 할 절절한 사연이 있음에도 그 뒷말을 지운 듯한 말 줄임의 구구…… 또 한편 달달한 아이스크림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한 이 구구가 이토록 씁쓸하게, 더불어 슬프게 들리는 이 느낌은 아마도 입이 있어도 할 말을 다 못 하고 사는, 살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인생의 이름표로도 읽히기 때문일 것이다. 정말이지 산다는 것은 왜 이렇게 힘든 일일까. 입도 제대로 뻥긋하지 못할 만큼 왜 이토록 고통일까.
시인의 말
1부 어디까지 와 있는 걸까
식물
구구
개가 사라진 쪽
어깨에 기대왔다
중년(中年)
공
나비
버찌의 저녁
라일락 그녀
정물
화전민
사과
문어
지난겨울 죽은 새를 묻어준 곳에 어린 딸과
함께 가보았다
앵두 일식
명랑
거울의 뒷면
봉지 쌀
출산
2부 씨앗이 흙과 어울릴 무렵이었다
무지개
가장 오래된 기억
생일
모과나무는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고
구더기
봉천동엔 비가 내리는데 장승배기엔 눈이 온다
벚꽃 활짝 핀 어느 봄날에
풀도 나무도 아닌 넝쿨
필라멘트
침투
구호
지네
누수
수컷
비단잉어
철책선
아버지를 기다린다
첫사랑
고영민
새조개
기념탑 근처
혼자 사는 개
3부 울면서 옛날의 얼굴로
새
노을
남향집
밤 벚꽃
개 줄
과거
반쪽 몸
종이 등
오디
반가사유
꽃나무를 나설 때
아가미 호흡
학수
피꼬막
여름 빛깔
화분
백숙
사랑
9월
입병
가슴에 매미 브로치를 달고
전류가 흐르는 모기채
눈의 사원
돼지고기일 뿐이다
하모니카 음악학원
연기의 시선
햇빛야구
연두
빈 박카스 병에 대한 명상
옛일
어떤 글자
된장
모면
꽃과 집 사이
시클라멘
뱀
밤의 주차장
우는 집
꽃다발
얼음옷
소태나무
물 없는 계곡의 돌들
서우(暑雨)
해설|그냥 한참 울다 가야 할 것들
|유성호(문학평론가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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